여행과 답사/불문사 대마도답사

불문사 대마도답사(2) 일본의 대륙 침략에 대한 욕망과 집념

북쪽의완행열차 2018. 12. 12. 23:13


이번 편의 부제목으로 일본의 대륙 침략에 대한 욕망과 집념이라고 붙였는데 그 이유는 뒤에서 털기로 하겠다.


아침 7시에 밥준다 해서 6시에 알람을 맞춰놨지만 그 전인 5시 50분 경에 기상........ 거사를 치룰 겸 씻기 위해 복도로 나오자마자 냉기가 뼛속까지 들어와서 잠 하나는 확실히 깼다. 일본식 아침을 먹고 난 후에 다시 돌아와 짐을 챙기고 신세졌다고 인사를 한 후에 적당한 곳에 짐을 두고 주변을 한 바퀴 둘러봤다. 맨 처음 눈에 보인 것은........


봤을 때는 우리의 장승과 같이 부정한 것을 막는, 벽사의 기능을 하는 일본의 신인줄 알았는데 부동명왕 이라고 한다. 한국에는 없기에 더욱 특별하지만 나의 무식이 빚어낸 참사였다. 그리고 귀국 후, 수업 중에 누가 숙소 근처에서 불의 신을 봤다고 했는데 그게 이 분(?)이다.


숙소 앞에 있던 지장보살님. 일본에서의 지장보살은 그야말로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부처님이라고 한다. 추울까봐 옷을 입히고 배고프시고 목 마르실 때 언제라도 잡수시라고 공양을 올려놓은 데서 일본인들의 지장보살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엿볼 수 있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나 또한 향을 올리면서 한국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고보니 부처님의 생김새가 한국과는 다르게 생겼다.


일본에 가면 철교만이 아닌, 차량용 교량에도 트러스 형식을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볼 수 있다.


바다로 나가는 어선, 만선보다 무사히 돌아오기를 마음 속으로 기도한다.


사람이 어느 정도 모이자 즉석에서 지장보살에 대한 강의가 시작되었다. 아침에 즉석에서 진행된 강의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알찬 강의였다. 참고로 지장보살과 앞의 부동명왕을 모신 집같은 건물을 호코라 라고 부르는데, 지장보살을 모신 호코라에는 문이 달려있다고 하는데, 야생동물들이 먹을 것을 가져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강의를 듣다보니 버스가 온 줄도 모르고 있다가 가이드가 와서 곧 출발해야 한다고 해서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갔다. 솔직히 히타카츠로 382번 국도를 타고 바로 가는 줄 알았는데 이즈하라 방향으로 가던만 도착한 곳은...


카미자카 공원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즈하라 중심지에서도 제법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대마도 도주(섬의 최고 지배자)의 후손이 남긴 글과 세계지도. 글의 내용을 보니 섬(대마도)도 여위었지만 친구도 여위었다. 물고기 모양을 지우면서 잠자코 물결을 본다. 자신에게 꿈이 있다고 친구에게 말하자 그 친구가 비웃었다. 심야에 세계지도를 펼쳐서 콤파스를 잡고 대마도를 중심으로 한 바퀴 돌려본다는 내용으로 1964년에 간행된 대마도지지의 서문이었다. 당시에 쇠락해가던 대마도의 모습을 보던 그의 심정은 어땠는지가 여실히 느껴진다.


풍경은 좋은데 조절을 잘못해서 이렇게 나왔다.



이번 편의 제목이 불교와 거리가 먼 일본의 대륙 침략에 대한 욕망과 집념이라고 붙였는데 지금부터 보여주는 곳들이 그러한 곳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러시아 제국과 전쟁을 하던 20세기 초, 일본은 러시아가 어디로 올지 몰라서 북쪽의 히타카츠 인근에 토요포대를, 그리고 남쪽의 이즈하라 인근에 포대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잘 알려진 토요포대와 달리 이 곳 카미자카 포대는 그다지 잘 알려진 편이 아니다.  그리고 히타카츠 인근의 토요포대와 가덕도의 외양포 포대 용호동 인근의 장자등 포대를 연결하면 삼각형 모양으로 포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된 얘기는 맨 마지막에 다시 하기로 하겠다.



兵舍터를 알리는 표지판...... 가덕도 외양포와 달리 이 곳은 나름대로 원형을 가지고 있었다.


화려하게 생긴 것을 보니 毒草로 보인다.



포병들이 근무하던 곳....... 대략적인 내용을 보니 대마도는 일본함대의 전진지기였으며 곳곳에 포대와 포병이 있었다. 이 곳 일대는 러시아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한 포병의 야외 근무소가 있던 곳으로 콘크리트 벙커는 병사들의 쉼터(내지는 휴게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계단까지 온전하게 남아있다. 정말이지 일본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생김새가 가덕도의 그것과 묘하게 닮았다.


兵舍유적지. 이 곳은 앞선 곳과 달리 포병 뿐만 아니라, 잡역꾼, 취사병을 포함한 백명이 머물 수 있었으며 비오는 날에는 대포를 이 곳에 두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2차 대전 중에 演習용 병사로 사용되다가 전쟁 후에 국제무선용 동력을 공급하던 발전기가 설치되었다고 한다.그야말로 다용도로 쓰였던 셈이다.


뭔가 건물이 있던 자리. 병사 옆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아마 창고 내지 무기고가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내가 무기고라고 짐작하는 이유는 화약고라 하기에는 뭔가 좀 어설프고 兵舍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이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가덕도 외양포 포진지 인근에 있는 화약고를 들 수 있다. 잠시 그 사진을 보고 가자. (참고로 가덕도 외양포는 부산의 가장 끝으로 마을 전체가 일제시대의 병영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참고로 이게 외양포 포진지 인근에 있는 화약고 흔적이다. 오른쪽을 보면 알겠지만 화약고에는 폭발을 방지하기 위해 방폭벽(?)을 쌓은 후에 지면에서 일정 높이만큼 이격시킨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돌아 본 兵舍. 당시 이 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근무를 했는지 대략이나마 짐작이 갔다.


이 것을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바로 砲座만 남은 가덕도 및 지심도와 달리, 제법 원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곳에는 반드시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벙커 내지는 방어용 해자가 있던 곳으로 추측된다. 어쩌면 포부대 특성상 물은 핖수가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앞에서 버스가 상당한 물건이라고 했는데 흐릿한 제조연월을 보면 (헤이세이, 평성)2년 12월에 제작되었다고 한다. 이를 서기로 환산하면 무려 1990년 12월 제작이라는 말이 되는데 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영업용 차량의 최대 내구연한이 9년+2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19년을 더 운행하고 있는 셈이다. 그만큼 닦고 쪼이고 기름치고 공기압 체크하고가 철저하겠지..... 참고로 일본은 한국과 달리 샤시명칭(?)으로 부른다고 한다. 혹시나 해서 차대와 차체번호는 자체적으로 검열을 했으며, 기관형식에 적힌 6D15엔진은 170마력 정도라고 한다. 참고로 170 마력이면 소형버스(카운티, 레스타)와 출력이 비슷한 편이다.



잠시 얘기가 샜는데(엔진만 나오면 이모양이다) 어쨌든 다음에 간 곳은 만관교(만제키바시)라는 곳이었다. 이 곳 또한 일본의 대륙침략에 대한 야욕이 숨어 있는 곳이다.



겉으로 보면 평범한 다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밑을 내려다 보면.........



뭔가 냄새가 나지 않는가?


인공적으로 판 흔적이 보이는데.......


그리고 빼도박도 못하는 인공수로라는 증거!!!!!!


실제로 만관교는 대마도의 가운데를 일부러 잘라서 만든 수로 위에 세웠다고 한다. 당시 기술이 약하고 수심이 얕아서 이 곳을 지나는 배는 전부 일정 높이만큼 들어 올려서 이 곳을 건넜다고 하는데 이 것이 아마 그 당시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당시 일본의 토목기술을 보면 정말이지 신의 경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문제는 이것을 수송 및 무역이라는 좋은 용도가 아닌, 대륙침략(일본은 대륙진출이라고 한다)에 썼다는 점이지......



이러한 일본의 토목기술은 일본의 전후재건에 밑바탕이 되었으며,1940년에 개통된 세계 최초의 철도용 해저터널인 칸몬터널(산요본선 시모노세키~모지를 연결하는 해저터널)을 시작으로 1964년 도카이도 신칸센, 1975년 산요 신칸센, 1988년에 완성된 세이칸 터널과 같은 철도사에 길이 남을 역작(?)들을 탄생시키게 되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점 또한 적지 않다는 점에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다음편에서 계속 인줄 알았지? 몇 마디만 더하겠다.


솔직히 이번 편의 장소들은 어떻게 보면 한국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러일전쟁과 쓰시마 해전 당시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지만, 이런 얘기를 하면 밑도 끝도 없고 제 손목도 아플 뿐더러 글 한번 쓰다가 밤새거나 하루 홀딱 보낼 각이기 때문에 이정도에서 서술합니다. 그리고 일본의 토건과 토공에 대한 내용도 같이 다뤄야 해서 이중으로 머리아프죠........


쓰시마 해전과 그 배경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1905년 1월, 뤼순을 점령한 일본은 러시아 함대가 발트해에서 출발해서 블라디보스톡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동맹국이었던 영국에게 잠가라 수에즈운하라는 주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러시아 함대는 아프리카 최남단인 희망봉 찍고 반년 넘게 거의 지구를 반 바퀴 도느라 보급도 못 받고 병사들도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대마도 인근에 이르렀을 때(1905년 5월 27일 오후 2시 경) 이곳에 있던 도고 헤이하치로 휘하의 일본군 해군의 T자 전법 앞에 그야말로 처참하게 박살나고 만다.

당시 도고가 썼던  T자 전법은 함대를 가로로 배치하여 넓은 공격 범위의 확보가 가능하였으며, 이로 인해 세로로 줄지어 오던 러시아 해군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히게 된다.

이 해전이 20세기 최초의 대규모 해전인 쓰시마 해전이며, 이 때의 공적으로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도고 헤이하치로는 당대 최고의 해군 지휘관이라는 영예를 얻게 된다. 하지만 당시 도고가 내걸라고 지시했던 깃발이 투망준비 내지 예인요청을 의미하던 Z기였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일본답게(?) 비열한 수법으로 인한 것 또한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젠 진짜로 다음 편에 계속.


2018년 12월 30일 수정 및 공개